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 Yongjin
- 2015년 1월 23일
- 4분 분량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선의 움직임, 변화, 감정을 담아 정심을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예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로 정의할 수 있다. 예로부터 선비이며,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교양으로,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겨졌다.
서예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역사, 철학, 문학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자신의 인격수양이 요구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광개토대왕비의 글자체와 신라시대 명필가였던 김생의 행서를 집자해서 새긴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에서 옛 선조들의 글씨체를 통해 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많은 명필가들 중에서 중국의 서예가인 구양순, 왕희지, 동기창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왕희지(王羲之)는 동진(東晉) 307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에서 출생하여, 365년 사망했고, 별칭 왕우군, 자 일소(逸少)이며,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주요작품은 『악의론』, 『황정경』, 『난정서』, 『십칠첩(十七帖)』이 있다. 또,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그는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다음으로 구양순(歐陽詢)은 원어로는 QuyangXun으로 읽고, 자는 신본(信本), 557년 담주 임상(후난성)에서 출생, 641년 사망했다.
그는 진의 광주자사였던 부 흘(父紇)이 모반혐의로 죽음을 당하자 아버지의 우인인 강총에게서 양육되었다.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가 되고 당 고조가 즉위한 뒤 급사중(給事中)의 요직에 발탁된다. 처음 왕희지의 서예를 배우고 후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서예명은 고려에까지 알려졌다.
무덕7년(624)에 칙명에 의하여 배구, 진숙달 등과 함께 『예문유취(藝文類聚)』100권을 편찬했다. 태종의 홍문관에서 우세남과 함께 귀족 자제에게 해법을 교수하고 후에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이 되어 발해남작을 받고 ‘은청광록대부’가 되었다. 모든 서체를 다 잘하였으나 특히 해서에 훌륭하였다. 우세남, 저수량, 설직과 함께 “초당 4대가”로 꼽힌다.
현존하는 서적에 『황보탄비(皇甫誕碑)』, 『화도사탑명(化度寺塔銘)』, 『9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온언박비(温彦博碑)』등 해서비 외에 예서의 『방언겸비(房彦謙碑)』, 『사사첩(史事帖)』, 『몽존첩(夢尊帖)』등의 행서, 기타 『순화각첩』에 각(刻)된 척독의 종류 『천자문』등이 있다.
그의 저서는 『황보탄비(皇甫誕碑)』, 『화도사탑명(化度寺塔銘)』, 『9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온언박비(温彦博碑)』, 『방언겸비(房彦謙碑)』, 『사사첩(史事帖)』, 『몽존첩(夢尊帖)』이 있다.
마지막으로 동기창은 원어로 Qichang Dong로 불리며, 명대 후기의 서예가. 화가이다. 그의 자 현상(玄常), 호 사백(思白), 호 향광(香光), 시호 문민(文敏)으로 1555(명 가청 34)년에 화정(상하이시 송강)에서 출생, 1636년 11월 11일(승정 9)에 사망했다.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講官)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神宗實錄)』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文敏),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禪理)를 시문서화(詩文書畵)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未芾)을 종(宗)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邢侗) 미만종(米万鍾) 장서도(張瑞圖)와 함께 ‘형장미동(邢張米侗)’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戱鴻堂法帖)』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正系)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黃公望)에서 동원(董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荊溪招隱圖卷)』(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靑弁山圖)』(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畫論家)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容台集)』, 『화선실(畵禪室) 수필』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