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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평전, 안칭 친 지음, 김기협 옮김, 돌베개, 2011.

  • 작성자 사진: Yongjin
    Yongjin
  • 2015년 1월 23일
  • 6분 분량

‘공자’의 리더십

1. 공자의 출생 배경

춘추 시대 말기인 기원전 551년 태어났다. 성은 공이고 이름은 구, 자는 중니다. 17세기 이후 ‘공 선생님’이라는 뜻의 ‘공부자’란 호칭이 서양에 알려져 ‘Confucius’라고 적힌다. 그의 고향은 노나라로 노나라는 역사, 문화, 혈통 도덕적 의무 등을 통해 주나라 천자의 제후국 중 하나로, 중국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공자는 기원전 552년(또는 기원전 551년)에 군인이었던 ‘숙량흘’에 의해 태어났다. 이미 노인이었던 숙량흘은 본처 소생으로 딸 아홉에 첩 소생으로 다리가 성치 못한 아들 하나가 있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숙량흘이 안씨 집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잉태했다.” 야합 후의 일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두 사람은 ‘니구’라는 산에서 기도하고 공자를 얻었다. 노나라 양공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나면서 머리에 우묵한 데가 있어 이름을 ‘구’라고 지었다. 자는 ‘중니’고 성은 ‘공’씨다.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일고, 남겨진 모자는 어렵게 지냈으며, 공자가 아직 젊을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열여덟 살에 병관 집안으로 장가들어 곧 아들 하나를 얻고 얼마 후 딸 하나를 얻었다.

2. 공자에 대해 기록된 책들

논어, 좌전, 사마천의 공자 전기

‘논어’는 공자를 그의 가르침에 맞춰 틀에 넣지 않은 자료이다.

‘좌전’은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68년까지의 시대를 담은 책으로, 노나라의 공식 연대기 ‘춘추’에 붙인 ‘전’의 하나로 ‘전’이란 원전 내용에 대한 설명과 주석이다. 이 책은 어느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어느 대신이 쫓겨난 까닭은 무엇인지 등, 이 책의 구성은 원서인 ‘춘추’의 항목 하나하나에 짧막한 글을 붙이는 형식으로, 대화와 연설도 수록되어 있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춘추’에는 정치적 중요성을 가진 사항만 기재되어있다. 예를 들면 국가 사이의 교류, 제후의 결혼과 죽음, 재상의 임용과 퇴직, 중요한 사행과 회맹, 정벌의 성공과 실패, 추방과 처형, 반란과 찬탈, 제사와 길흉의 조짐 등이 그 내용이다.

기원전 1세기 ‘한’나라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공자 전기를 만들었다. 이 전기는 지금까지 중국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남아 있으나, 사마천과 공자 사이의 500년 시대 차이가 있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사마천은 과거를 복원하는 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상상력을 많이 활용했다. 즉,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재현함에 있어서 역사의 무게에도 기록의 빈틈에도 구애받지 않았으며, 사실 공자 전기는 그가 지은 100편의 전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3. 공자의 멘토

주공

공자는 스스로 “나는 전해줄 뿐, 지어내지 않았다. 옛것을 믿고 좋아할 따름”이라고 했다. 공자가 역사 속에서 지표로 삼은 인물은 주공, 주나라 개창자인 무왕의 동생이었다. 주공은 공자가 자기 시대를 위해 하려고 하는 일을 주나라 초기에 이룩한 사람이다. 그는 무왕의 조정에서 대신으로 있다가 무왕의 계승자 성왕이 어른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천자가 되지 않고도 천자가 할 일을 하고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기원인,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주공이 자기 아들을 보내 세운 제후국이 노나라는 사실, 주공을 노나라 사람들이 조상으로 받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주공은 조카 성왕이 성년이 되자 동방으로 은퇴했다. 주나라 초기의 기록에는 주공이 정치에서 물러난 이후의 모습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공자가 공식 기록보다 더 위대한 모습으로 주공을 되살려냈다. 주공은 공자가 신하로서 본받고 싶은 인물이었고 공자가 생각한 도덕에 부합한 인물이었다.

4. 공자의 대표 제자

자공, 안회, 자로

공자는 자신을 ‘자’, 즉 스승이라 부르고 자기네를 ‘도’, 즉 제자라 칭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의 대화 과정을 통해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귀족과 ‘사’ 집안 자제들과 상인, 농민, 장인, 군인, 죄인도 있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존재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자공, 안회, 자로의 세 사람이다.

자공은 상인으로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다. 당시의 상인은 귀족 가문에 의존하는 존재로서, 지역에서 나지 않는 물건들을 주군이 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고, 죽으면 자식들이 그 일을 물려받았다. 특정지역에만 생산되는 원료와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상인들의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상인들은 주나라 초기부터 만들어져있었고, 춘추시대에 들어서서 더욱 규모가 커져 있는 도로망을 이용하여 상품을 옮겼다. 이 도로에서 오고가는 모든 것을 활용한 정보수집을 하는 등 정보망을 활용하고, 오래지 않아 상인들 중에서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다. 춘추시대 말기가 되면 상인 출신의 대신이 나타나고, 대신 자리에서 물러나 상인이 되는 사람도 나타난다. 자공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고, 당시의 사회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였다.

안회는 ‘사’ 계층으로 지능과 상상력, 야심에 있어서도 자공에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상인으로 나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에 가난했을 뿐 높은 이상을 품고 “누추한 동네에 사는”데 만족한 사람이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배우려는 열망이 가장 강하고, 가장 꾸준한 사람이 안회였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때문이었다. 안연은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고, 스승은 그의 옆이나 바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말씀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거기에 ‘한번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스승조차도 그가 배운 바를 실천하는 치열한 자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안회가 죽자 공자는 너무나 슬퍼서 일체의 자기 통제력과 균형 감각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들은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안회를 위해서 아니라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슬퍼하겠는가?” 안회의 죽음이 일으킨 충격이 가라앉자 공자는 합리적이고 평온한 태도로 돌아왔다. 안회의 아버지가 공자에게 마차를 팔아 곽(바깥 관)을 사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제자들은 공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공자는 이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안회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므로 곽을 쓰는 것도 후한 장례도 적절히 않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런 과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남은 사람이 잊을 수 없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자로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공자를 처음 만날 때, “닭볏 모양 모자에 멧돼지 가죽 띠를 매고 공자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공자는 예를 베풀어 자로의 마음을 끌었고, 자로는 가르침을 받을 마음을 먹고 다른 제자들을 통해 입문을 청했다. 공자보다 겨우 아홉 살 아래인 자로는 입문 후 공자의 수행원이자 자발적 보호자가 되었다. 자로에게는 자공과 같은 재기도 없었고 안회와 같은 선을 향한 의지도 없었다. 그는 욕심도 없고 악의도 없는 사람이었다. 너그럽고 용감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나 의무감을 느끼는 상대를 절대 배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이 인을 향하는 길이 아니라고 자로에게 말했다. ‘좌전’에 다르면 기원전 480년 공자가 죽기 전 해에, 자로는 ‘위’나라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공씨(공자와는 다른 집안)의 가신으로 있었다. 그 전에 위나라 제후 ‘영공’이 태자 ‘과외’를 쫒아내고 태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일이 있었다. 영공이 죽자 그 손자 ‘출공’이 즉위했고, 출공의 아버지인 전 태자는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외는 자기 누이 ‘백희’와 함께 출공을 쫓아내고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 백희는 공씨 집안에 시집와서 그의 아들 공회가 가문의 수장이 되어 있었고, 나이가 어리고 성격이 유순해서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거사의 날 과외는 여자 옷을 입고 공씨 저택의 문을 통과해 백화를 찾아갔다. 백회가 식사를 마친 후 창을 들고 앞장섰다. 무장을 한 과외와 다섯 사람이 돼지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공회를 변소에 몰아붙여 서약을 받아냈다(돼지는 피를 서약에 쓰기 위한 것임). 공씨의 가신 하나가 변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출공을 마차에 태워 노나라로 향했다. 도성 밖에 있던 자로가 소식을 듣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성내로 들어갔다. 과외의 지지자들은 자로를 쓰러뜨리고, 나중에 그 시체를 저며 젓을 담갔다.

5. 공자의 가르침은 대화

제후, 대신, 무지한 사람들과의 대화

14년간의 유랑 생활을 포함하는 여행길에서 공자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제후와 촌부, 대신과 은둔자와 깡패, 악사, 미치광이까지 있었다.

제후들과의 대화에서는 정치의 기본 원리가 주제였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임금이 되기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임금이 신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나라를 망칠 수 있는가?

대신들과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주제로 삼는 일이 많았다.

인간에게서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품성의 사람을 고위직에서 추천할 수 있는가?

임금과 조정에 적합한 사람과 귀족 가문의 가신 노릇에 적합한 사람의 차이는?

무지한 사람들과 대화에서도 공자는 거만하거나 초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천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성심으로 물으면, 나는 양쪽 끝을 두드리며 정성을 다하였다.’고 말한데서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6. 공자의 가르침의 주제

공자는 누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자기 생각대로 말함

공자의 대화에는 반론자가 나타나는 일이 좀체 없었고, 어쩌다 나타날 때라도 공자는 상대방 입장에서 규칙에 따라 반박할 필요를 느끼는 일 없이 누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자기 생각대로 얘기했다.

그의 대화 주제는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그의 대화에서 교육자로서의 공자의 능력과 기술을 볼 수 있다.

장례와 제사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방법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는 방법

노망드신 부모를 대하는 방법

어떤 사람이 어진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명철한 사람인지

어진 사람은 속여먹기 쉬운 것인지

공부는 어떤 방법으로 해어 어떤 지식을 얻어야 하는 것인지

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과 음악을 아끼는 방법

세상에 뜻을 펼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하는지

7. 노나라를 떠나는 배경

공자는 ‘계환자’ 가문의 ‘창고 담당’과 ‘가축관리인’으로 시작해서 지방관인 ‘중도재’와 토목 담당인 ‘사공’을 거쳐 ‘대사구’이 이르렀을 때인 기원전 497년 갑자기 관직에서 물러나 여행길에 올랐다. 대사구는 그리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며, 임금(제후)와 가끔 대면할 기회가 있고, 바로 윗사람은 ‘재상’이었다. 기원전 497년에는 노나라 임금은 ‘정공’이었고, 재상은 ‘계환자’였다.

공자가 대사구 자리에 오를 무렵에는 자공, 안회, 자로를 포함한 한 무리의 추종자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대개 든든한 배경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선비를 따라다니며 배움으로써 언제고 선비다운 품성과 직업을 가지고 독립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날이 올 때까지 생활을 보장해주고 출세의 길을 열어줄 연줄을 대주는 것이 스승의 몫이었다.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가 자기들을 그 위치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했다.

‘논어’에는 공자의 갑작스런 출발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인과 악대를 선물로 보내고 계환자가 이것을 받은 뒤 사흘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공자가 떠났다.” 맹자는 이에 대해 다음 설명을 붙였다. “공자가 노나라 ‘사구’였으나 (임금이) 그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라에 제사가 있었는데 제사 고기를 보내지 않으니 제사 모자를 벗을 틈도 없이 바로 떠났다. 알지 못하는 이들은 고기를 받지 못해서라 생각했고 아는 이들은 (노나라 지배자들이) 예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497년 길을 떠날 때 공자는 가정에 대한 의무와 부담이 없는 편이었다. 부모는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되었고, 아내와는 이혼했고, 아들은 벌써 서른다섯 살이었고, 딸도 그보다 많이 어리지 않았다.

8. 공자가 생각하는 선비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데 관심이 있던 자공이 공자에게 어떤 사람을 선비라 할 만한지 물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스스로를 가다듬는 데 부끄러움을 알아 어느 나라에 사신으로 가더라도 임금의 명령을 욕되이 하지 않는 자를 선비라 할 수 있다.”

“그다음은 어떻습니까?”

“가문에서 효성스럽다는 말을 듣고 동네에서 공손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다.”

“또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뱉은 말은 꼭 지키고 행동을 하면 끝을 보는 자다. 머리에 든 것 없는 소인이지만 그래도 그다음이라 할 것이다.”

“지금 정치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아이구, 시원찮은 것들. 셈에 칠 것도 없다.”

9. 유랑, 정치를 통한 사회 변혁을 위한 열망

기원전 497년에서 기원전 484년까지, 사마천이 말하는 공자의 행적을 보면 수천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며 일곱나라를 왔다 갔다 했다.

장자는 공자가 위나라, 송나라, 진나라, 채나라의 네 나라를 다닌 이야기를 한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시작해 송나라와 채나라, 그리고 아마 초나라를 거치고 돌아오는 길에 진나라에 들렀다가, 위나라에서 몇 해 지낸 다음 노나라로 귀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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